같은 그룹 다른 운명, 국내 대형 전기 SUV 시장의 지각변동
소비자의 선택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점에 대한 심층 분석
국내 대형 전기 SUV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후발주자인 현대자동차 아이오닉 9이 먼저 출시된 기아 EV9의 판매량을 압도하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불과 몇 달 만에 5배가 넘는 판매 격차가 벌어진 배경에는 ‘배터리 성능’, ‘주행거리’, 그리고 ‘가격 정책’이라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이런 역전극이 가능했던 것일까.
결정적 차이, 31km의 주행거리가 명운을 갈랐다
두 모델의 희비를 가른 것은 의외로 가장 기본적인 스펙이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누적 판매량에서 아이오닉 9은 5,921대를 기록하며 1,160대에 그친 EV9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소비자들의 선택이 한쪽으로 쏠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행거리 경쟁력이다.
아이오닉 9은 110.3kWh의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해 한 번 충전으로 최대 532km(환경부 인증 기준)를 달린다. 반면 EV9은 99.8kWh 배터리로 501km의 주행거리를 확보했다. 31km라는 수치상의 차이가 작아 보일 수 있지만, 대형 SUV의 주 사용 목적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패밀리카나 장거리 여행용으로 활용되는 대형 SUV 특성상, 주행 가능 거리는 소비자들의 구매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충전 인프라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행거리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심리가 아이오닉 9으로 쏠린 것이다.
비슷한 가격표, 소비자는 더 현명한 선택을 했다
성능 차이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가격표는 두 차량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기폭제가 됐다. 아이오닉 9은 더 큰 배터리와 긴 주행거리를 갖췄음에도 EV9과 비슷한 가격대에 출시되며 ‘가성비’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슷한 비용을 지불한다면 당연히 더 우수한 상품성을 지닌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약 당신이 8천만 원에 가까운 비용으로 패밀리 전기차를 구매한다면,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겠는가.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이오닉 9을 선택한 셈이다.
EV9이 ‘국내 최초의 3열 대형 전기 SUV’라는 상징성을 가졌지만, 시장은 더 이상 상징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기차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은 브랜드나 출시 순서보다 실질적인 가치를 더욱 꼼꼼하게 따지기 시작했다. 결국 배터리 성능과 가격 경쟁력이라는 기본기에서 앞선 아이오닉 9이 시장의 승자가 됐다. EV9의 판매량 반등을 위한 기아의 다음 전략이 주목되는 시점이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