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베이비붐 세대의 반전
“아들아 미안” 상속 대신 ‘내 인생’ 즐긴다

사진=생성형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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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막대한 상속을 한꺼번에 물려받을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오히려 자신의 삶과 건강, 여행, 노후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가에서는 오랫동안 110조달러(약 15경원 규모)에 달하는 고령층 자산이 젊은 세대로 빠르게 이동할 것이라는 이른바 ‘위대한 부의 이전(Great Wealth Transfer)’ 시나리오를 기대해왔다. 하지만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미 연방준비제도(Fed) 자료 분석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느린 속도의 상속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오래 사는 부유층이 늘어나고, 주식 투자로 자산이 계속 증가하면서 ‘자녀 세대의 돈벼락’은 생각보다 한참 뒤로 밀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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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보다 여행”…베이비붐 세대의 달라진 소비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보유한 세대는 61~80세의 베이비붐 세대다. 연준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4분기 기준 89조7000억달러(약 13경405조원)에 달했다. 여기에 80대 이상 초고령층 자산 20조6000억달러(약 2경9973조원)까지 더하면 미국 고령층 전체 자산은 약 110조달러 수준이다.

반면 밀레니얼과 Z세대 자산은 18조7000억달러(약 2경7208조원)에 그쳤다. 미국 부의 대부분이 여전히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문제는 이 돈이 곧바로 자녀 세대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부유한 고령층은 과거처럼 ‘남기기 위한 삶’보다 ‘쓰는 삶’을 택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고급 크루즈 여행, 프리미엄 은퇴 커뮤니티, 장수 의료 산업, 맞춤형 건강관리 등에 거액을 투자하는 고령층이 크게 늘고 있다. 단순히 은퇴 후 생활비를 쓰는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소비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실제 상당수 부유층은 자녀에게 목돈을 한 번에 상속하기보다 생전에 조금씩 나눠주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주택 구매 자금, 대학 등록금, 손주 교육비, 가족 여행 비용 등을 지원하며 ‘조기 증여’ 형태로 돈을 나누고 있다는 설명이다.

결국 시장이 기대했던 것처럼 특정 시점에 거대한 상속 자금이 한꺼번에 풀리는 구조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이동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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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으로 불린 자산…고령층 부 더 커졌다

미국 고령층 자산이 예상보다 더 커진 배경에는 장기간 이어진 주식시장 상승이 있다.

베이비붐 세대 상당수는 수십 년 전부터 미국 증시에 투자했거나 사업을 창업한 경험이 있다. 이들이 오래전 보유한 주식과 기업 지분 가치가 최근 수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자산 규모 역시 급격히 불어났다.

실제 지난해 4분기에만 베이비붐 세대는 1조달러 이상의 자산 증가를 기록했다. 이는 모든 세대 가운데 가장 큰 증가폭이다.

자산 구성에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베이비붐 세대 자산 중 약 33%는 주식과 펀드였고, 부동산 비중은 21%, 은퇴자산은 18% 수준이었다. 반면 밀레니얼과 Z세대는 부동산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특히 미국 부유층은 앞으로도 더 오래 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UBS가 억만장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대다수가 “10년 전보다 더 오래 살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라지 체티 연구팀 분석에서도 소득 상위 1%는 평균적으로 80대 후반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래 살수록 의료비와 장기요양 비용, 여가 소비는 더 늘어난다.

즉, 고령층 자산이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증가하거나, 살아 있는 동안 소비로 상당 부분 소진될 가능성도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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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수혜자는 밀레니얼 아닌 X세대

흥미로운 점은 상속을 가장 많이 받을 세대 역시 예상과 달라지고 있다는 부분이다.

그동안 금융업계는 밀레니얼 세대를 미래 최대 상속 수혜자로 꼽아왔다. 하지만 최근 전망에서는 오히려 X세대가 가장 큰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업체 세룰리 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앞으로 12년 동안 가장 많은 상속을 받을 세대는 45~61세의 X세대가 될 전망이다.

이미 상속이 이뤄지는 연령대 자체도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50대 후반이 상속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이였지만, 최근 조사에서는 60대 중반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배우자 상속 비중도 상당하다. 올해 미국에서 배우자에게 먼저 이전될 것으로 예상되는 자산은 약 1조3000억달러 규모다. 반면 X세대 이하 자녀 세대로 넘어가는 자산은 약 2조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결국 ‘젊은 세대가 부모 재산으로 인생 역전한다’는 식의 기대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부의 이전 자체는 결국 일어나겠지만, 시장이 상상했던 것처럼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형태는 아니라는 의미다.

브루킹스연구소 경제학자 존 세이블하우스는 “거대한 부의 이전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없다”면서도 “다만 사람들은 그 과정과 속도를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110조달러 규모의 미국 고령층 자산은 결국 다음 세대로 이동하겠지만, 그 과정은 ‘한 번의 폭발적 상속’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느린 이동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은정 기자 kej@news-wa.com